유명시 모음 26

바짝붙어서다 /김사인

바짝붙어서다 / 김사인 굽은 허리가 신문지를 모으고 상자를 접어 묶는다몸빼는 졸아든 팔순을 담기에 많이 헐겁다승용차가 골목 안으로 들어오자바짝 벽에 붙어선다유일한 혈육인 양 밀차를 꼭 잡고 고독한 바짝 붙어서기더러운 시멘트 벽에 거미처럼 수조 바닥의 늙은 가오리처럼 회색 벽에 낮고 낮은 저 바짝 붙어서기 차가 지나고나면 구겨졌던 종이같이 할머니는 천천히 펴진다밀차의 바퀴 두 개가 어린 염소처럼 발꿈치를 졸졸 따라간다 늦은밤 그 방에 켜질 헌 삼성테레비를 생각하면기운 씽크대와 냄비들 그 앞에 선 굽은 허리를 생각하면 목이멘다방 한구석 힘주어 꼭 짜놓았을 걸레를 생각하면

유명시 모음 2024.08.28

2024무등일보 신춘문예 젠가

젠가 / 홍 다 미 우리는 즐거움을 쌓기 시작했죠 딱딱한 어깨를 내어주며 무너지지 않게 한계단 한계단 다짐을 쌓았죠 대나무가 마디를 쌓듯 빌딩이 올라가고 집값이 올라도 내일 모레 글피 그글피를 오지 않는 내일을 오늘 처럼 지금처럼 바람 무게를 견디려면 마스크 쓴 계절도빙하 녹는 북극도 쌓아야 하는데 밤하늘이 별빛을 빼내고 있었죠 쌓기만 하는 뉴스는 싫증 나고요거꾸로 가는 놀이를 해볼까요 쌓아놓은 블록을 하나씩 빼내는 놀이 장난감을 빼버리면 아이는 자라서 부모 눈물을 쏙빼고최저임금을 빼내면 알바는 끼니를 빼먹고 잠을 빼면 기사님은 안전이란 블록을 빼내고야 말겠죠 언젠가 도심 백화점도 한강 다리도 이 놀이를 즐기다 쏟아졌고 모닝키스도 굿나잇 인사도 기념일도 블록으로 빼내면 연애도와장창 무너 지겠죠 한순간 한..

유명시 모음 2024.07.16

시운전 / 강 지 수 2024 매일 신문 신춘문예

시운전 / 강 지 수 날때부터 앞니를 두 개 달고 태어난 아이치고 천성이 소심하다 했습니다 가장 부끄러운 기억이 뭐예요? 종합병원 의사들이 한자리에 모여 발가벗고 있는 나를 내려다 보았을 때요 그게 기억나요 최초의 관심과 수치의 흔적이 앞니에 누렇게 기록되었지요 나와 함께 태어난 앞니들은 백일을 버티지 못하고 삭은 바람에 뽑아야 했지만 어쩐지 그놈들의 신경은 잇몸 아래에 잠재해 있다가 언제고 튀어 올라 너 나를 뽑았지 우리 때문에 너는 신문에도 났는데 하고 윽박을 지를것 같더란 말입니다 횡단 보도를 건너다 대자로 뻗었을 때 혹은 동명의 사체를 발견 했을때 그럴때에는 앞니를 떠올려보곤 하는 겁니다 천성이란 무엇인지 왜 어떤 흔적은 흉터로서 역할을 하지 못하고 삭아져버리는지 당신 당신은 한 번 죽은 적 있지..

유명시 모음 2024.02.26

가장 낮은 곳의 말 / 함 종 대

가장 낮은 곳의 말 / 함 종 대 발톱은 발의 말이다 발은 한 순간도 표현하지 않은 적이 없지만 나는 낮은 곳에 귀 기울이지 않았다 짓눌리거나 압박받는 곳에서 나오는 언어는 어감이 딱딱하다 그렇다고 낮은 곳 아우성이 다 각질은 아니어서 옥죈 것을 벗겨 어루만지면 이내 호응한다 늦은 퇴근 후 양말을 벗으면 탈진하여 서로 부둥켜안고 있는 발가락들이 하는 말을 더럽다고 외면한 날이 많았다 안으로 삼킨 말이 발등으로 통통 부어 오른날 도 있었다 어둠 속에서 나에게 내미는 말을 나는 야멸차게 잘라내며 살았구나 오늘은 발을 개울에 데려간다 물은 지금 머무는 곳이 가장 높은 곳이라 말하지 않아도 속내를 아는 양 같은 족을 만난 듯 온몸으로 감싸 안는다 발이내어 놓는 울음인지 물의 손길인지 분간할 수 없는 감정이 봄나..

유명시 모음 2024.01.11

상현달을 정독해 주세요/ 박동주

상현달을 정독해 주세요/ 박동주(본명 박 현 숙) 햅쌀을 대야에 가득 담아요 차고 푸른 물을 넘치도록 부으면 햅쌀은 물에서 부족한 잠을 채워요 쌀눈까지 하얗게 불었을때 당신을 향한 마음이 몸을 풀어요 상현달 처럼 차오르는 마음을 알아차렸다면 속삭여 주세요 도톰한 떡쌀에 소를 넣어요 당신을 향한 비문은 골라내고 꽃물결이는 구절만 버무려 소를 만들어요 당신 생각으로 먹먹해지는 마음이 색색의 반달로 차오르도록 한밤중이 되었을때 서쪽 하늘을 골똘히 보아 주세요 반죽을 작게 떼어 양 손바닥 사이에 넣고 가을볕이 등을 쓰다듬듯 잔잔히 궁글려요 이야기를 담은 소를 가운데 넣어 가을 한나절을 빚은 색색의 상현달들 떡살에 별자리가 뜨기도 해요 비껴간 당신을 향해 밤하늘 높이 상현달을 띄워요 이야기가 스며든 여러 빛깔의 ..

유명시 모음 2024.01.02

레몬 / 김 완 수

레몬 / 김 완 수 레몬은 나무 위에서 해탈한 부처야 그렇잖고서야 혼자 세상 쓴맛 다 삼켜 내다가 정신 못 차리는 세상에 맛 좀 봐라 하고 복장을 상큼한 신트림으로 불쑥 터뜨릴 리 없지 어쩌면 레몬은 말야 대승의 목탁을 두드리며 히말라야를 넘던 고승이 중생의 편식을 제도(濟度) 하다가 단것 단것 하는 투정에 질려 세상으로 향한 목탁의 문고리는 감추고 노란 고치 속에 안거한 건지 몰라 레몬 향기가 득도의 목탁 소리 같잖아 레몬은 반골을 꿈꿔 온게 분명해 너도 나도 단맛에 절여지는 세상인데 저만 혼자 시어 보겠다고 삐딱하게 들어 앉아 좌선할 리 없지 가만 보면 레몬은 말야 황달든 부처가 톡 쏘는 것 같아도 내가 단것을 상큼하다고 우길땐 바로 문 열고 나와 눈 직끈 감기는 감화를 주거든 파계처럼 단맛과 몸 섞..

유명시 모음 2023.12.25

수풀떠들석팔랑나비의 작명가 에게 / 손택수

수풀떠들석 팔랑나비의 작명가 에게 / 손택수 수풀도 좀 점잖고 싶을때 있지 나비도 날개를 접고 곤히 쉬고 싶을 때 있지 마냥 떠들썩 팔랑거려야 하니 얼마나 고역인가 하긴 나도 내 이름이 싫을 때가 있으니까 집 없는 이름 한가운데 왜 집을 가졌는지 그래도 집 택 자 덕분에 시집이라도 몇 채 갖고 있는 건 아닌지 수풀떠들썩팔랑 나비 이름 부르면 잠자리채를 들고 곤충채집을 가던 소년이 보인다 면바지에 묻은 풀물처럼 잘 지위지질 않는 여름 나는 여전히 발꿈치를 들고 있다 잡았다 싶은 순간 나비는 늘 저만치 멀어진다 그때 내가 잡고 싶었던건 나비가 아니라 더 가까워질 수도 멀어질 수도 없는 저물도록 떠들썩 팔랑거리던 그 환한 거리가 아니었을까 이름 속에 들어올 수 없는 떨림을 알아서 앉은 나비를 품고 두근거리는 ..

유명시 모음 2023.12.18

석쇠 / 이 정 록

석쇠 / 이 정 록 숯불 위 석쇠를 거쳐야 생선의 몸에 길이 나지 비 늘과 살 사이 결을 지나 내장과 머릿속으로 사라진 불꽃의 길을 추억하는 서른셋이야 옆구리가 파헤쳐진 뒤에도 눈을 뜨고 있는 식어버린 생선과 밥상머리에 마주앉아 있어 불꽃이 지나간 자리에서 더욱 사무치 는 비린내 닫힌 아가미 밖으로 넘쳐흐르고 있어 몸 뚱어리만 뒤집어 준다면 처음처럼 석쇠의 길을 보여줄 수 있다는 저 눈과 마주치는 것은 쓰라린 일이야 그 런데 누가 내 눈을 접시 바닥에 깔려 있는 퉁퉁 부은 눈과 바꿔치기한 것일까 네가 와서 이 비린내를 좀 지져줘 남은 한쪽 옆구리가 지지직 석쇠의 길을 내는 동안 없는 한쪽 만신창이의 갈비뼈 위에 네가 누워줬으면 좋겠어 비린내 풍풍거리는 서른셋 몸에 길이 나는 사랑을 하고 싶어 창밖 그것도..

유명시 모음 2023.09.06

물의 잠을 엮다 / 이 정 희

물의 잠을 엮다 / 이 정 희 하구의 갈대밭에 쌀쌀해진 물의 겹겹이 돈다 물은 밀리고 밀려와서 아래로만 흐르는 존재 같지만 스스로 잠을 청하러 갈대 밭에 들기도 한다 자박자박은 스스로 드는 물소리고 두덕두덕은 갈대밭이 물 갈피를 여며가는 소리다 좀체 바닥을 드러내지 않는 수심은 뿌리들의 집이어서 한 웅큼 모아져야 가뭇가뭇 흔들리는데 둑과 둑 사이 넘나드는 물소리를 들치면 구부정한 허리가 보인다 한 걸음 한 걸음 시침하듯 땅을 꿰어 놓은 들녘 여름 내내 물을 빨아들였음에도 엮으면 바짝 마른 것들이 되는 갈대 아버지는 만 평의 물의 잠을 돌보고 속이 비어 가벼운 것들로 줄줄이 남매를 엮었다 휘어지고 늘어지며 유유히 마른 꽃 피우는 것 들 햇빛과 달빛이 한 대궁에서 마른 그 한 묶음을 추스르는 아버지 물은 오..

유명시 모음 2023.08.28

선물상자/ 이 동 호

선물상자 / 이 동 호 아이가 삼촌으로부터 상자를 담아 안는다 상자 포장지 위 심장 모양으로 매듭을 묶은 까만 리본 이 빠른 박동으로 크게 몇 번 두근거릴 것 같은 이 상자를 언제쯤 풀어야 하나 발신자 표시도 없는 상자의 까만 리본을 잡아 당기면 거기 아버지가 가득 들었을 것이다 자동차가 국도를 타고 한참을 달려가다 이 풍진 세상으로 들어선다 비포장도로 주변으로 아무렇게나 늘어선 나뭇가지 어 린 꽃잎마다 분진 가득하고 먼지를 가득 덮어쓰고도 꽃들은 한 계절 꽃일 것이다 아직은 추운계절이었기에 앞차가 일으킨 먼지를 뒤차 가 끌어다 덮는다 차는 아버지가 살았던 유년을 돌아 외딴 마을에 도착하고 차안에서 잠시 잠들었던 아이가 일어나 유채 만발한 언 덕을 오른다 아이보다 앞선 상자가 아버지의 아버지를 거슬러 오..

유명시 모음 2023.08.21