유명시 모음 26

거미줄 / 이 동 호

거미줄 / 이 동 호 누가 급하게 뛰어든 것처럼 내 방 벽 모서리에 동그랗게 파문 번진다 물속에 잠긴 것처럼 익숙한 것들이 낯설게 느 껴진다 바깥의 누군가가 이 눅눅한 곳으로 나를 통째 로 물수제비 뜬 것이 분명하다 곧 죽을 것처럼 호흡이 가빠왔다 삶의 밑바닥이 보이지 않았다 바닥으로 가라앉으면서 나는 나조차도 낯설게 느꼈다 내가 잠든 사이 창을 통해 들어온 거미 덕분에 내게도 수심이 생긴 것이다

유명시 모음 2023.06.27

노팬티 / 이혜미

노팬티 / 이 혜 미 사소한 약속들을 모아쥐느라 발자국을 놓쳤 다 오늘은 코르크 마개 빠진 와인병처럼 증발하 여 끈적해지고 난간이 놓친 빨랫감들 도처에서 얼룩지며 펄력였지 빨아 널어 두어도 금세 더러워지는 꽃잎들 어 떻게 팬티 한 장 없이 이 봄을 건너나 입술로 초 록을 더하고 손끝마다 일렁이는 벚꽃잎 내어주 면 그 얇고 허망한 직물을 엮어 속옷을 짓던 손 이 있었다 옅은 바람에도 온 몸을 뒤집어엎는 봄이라는 계절의 안감 속옷이 필요 없는 계절이었지만 혼자만의 혁 명을 저지르는 왕국에서 떠나는 요일들 투명해 지는 발자국들 취한 눈으로 사랑과 거부를 동시 에 말할때 벗은 종아리가 수치에 떨었다 그러니 우리는 꽃그릇에 손을 담근 채 증발하는 자 치 마를 까뒤집었던 꽃들이 태양의 먼 어깨위로 투신한다 나무들이..

유명시 모음 2023.06.27

샌드위치맨 / 신철규

비유모드로 이루어진시 샌드위치맨 / 신철규 그는 무관심과 무관심 사이에 있다 그는 좀더 투명해 져야만 한다 그는 처음에 모자와 마스크로 변장을 했지만 오히려 아무것도 하지 않는 것이 최선의 변장이란 것을 깨닫는다 그는 앞뒤를 구분하지 못한다 그는 말과 말 사이에 갇혀 걷는다 말의 고삐에 꿰어 말의 채찍질을 받으며 그는 납작해 진다 그는 양면이 인쇄된 종이가 된다 사람들이 그를 밟고 지나 간다 그의 온몸은 발자국 투성이다 어제는 피켓을 든 한 무리의 시위대와 함께 걸었다 그는 목소리가 없어 추방 당했다 그는 앞뒤로 걸친 간판을 벗고 그눌에 앉는다 건물과 건물 사이에 낀 그늘 사람들은 그가 그렇게 두툼한 줄 그제야 알아 본다 ................................................

유명시 모음 2023.06.18

상처 / 김해준

시적 진정성은 어떻게 확보 되나요 상처 / 김해준 옥탑은 섬이다 주민들은 난간을 경계로 마주한다 달은 집열등이 되어 고향이 그리운 사람의 눈을 빼앗고 이사온 중국인 부부는 체위를 바꿔가며 그림자극을 한다 곪은 달이 빠져 나왔다 모낭을 찢고 완숙이 된 염증 주위로 구름 이 멍들었다 대기가 천천히 말라 벼락을 뿌렸다 젖은 땅에서 풍장 냄새가 났다 어둠이 썩고 나자 짐승들이 눈을 떴다 가문 사회에 촉 을 틔우는 눈알들; 몇몇 고양이가 보호색을 입고 하얀 발로 달을 만 졌다 묽어진 빛이 눈가에 번졌다 통증이 천천히 실핏줄을 점거 했다 충혈된 뿌리에 감긴 사물들이 선명해졌다 천공에 상처가 덧씌워지 고 덜 여문 달은 새로운 무늬를 몸에 새겼다 헌 달은 부스러져가는 순간에도 땅에 그림자 묘석을 올렸다 싸르륵 잔상이 ..

유명시 모음 2023.06.18

바닥경전 /박해림.서울역 석실고분 / 하린

남들이 다 쓴것 같아요 무엇을 써야 하나요 바닥경전 / 박해림 엎드려 보아야 온전히 몸을 굽혀야 판독이 가능한 典( 법전 ) 이 있다 서 있는 사람의 눈에 읽힌 적 없는 오랜 기록을 갖고 있다 묵언의 수행자도 맨발의 현자도 온전히 엎드려야만 겨우 몇 글자를 볼 뿐이다 어느 높은 빌딩에서 최첨단 확대경을 들이대고 글자를 헤아리려 들었지만 번번히 실패 하였다 일찍이 도구적 인간의 탄생이후 밤새 달려야만 수평선을 볼 수 있다고 밑게 되면서 바닥은 사람들에게서 점점 멀어졌던 것이다 온전히 걷지 못하는 사람들이 울긋불긋 방언을 새겼던 것이다 ............................................................................................. 서울역..

유명시 모음 2023.06.12

소주병 / 공광규

남들이 다 쓴것 같아요 무엇을 써야 하나요 (시클) 소주병 / 공광규 술병은 잔에다 자기를 계속 따라 주면서 속을 비워 간다 빈병은 아무렇게나 버려져 길거리나 쓰레기장에 굴러 다닌다 바람이 세게 불던밤 나는 문 밖에서 아버지가 흐느끼는 소리를 들었다 나가 보니 마루끝에 쪼그려 앉은 빈 소주병이었다 공광규 시인의 소주병은 아버지 라는 고달픈 삶을 소주병이라는 대상물에 전이시켜 형상화한 작품이다 여기 늦가을 노을이 깔리는 강이 하나 있다고 치자.그것을 암 선고를 받은 화자가 바라보았다고 치자. 그렇다면 그 강엔 고름이 흐를것이다 이번엔 이별을 맞이한 화자가 그 노을을 보았다고 치자 그렇게 되면 그 강 한가운데엔 철조망이 처져 있을 것이다 고정된 현상을 다르게 인식 하는 것이 중요 하다

유명시 모음 2023.06.10